조약돌만큼. 아니, 바위만큼 모래알만큼의 하나
어느 퇴근길이었다. 늘 오가는 6차선 도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체를 빚었다. 꼼짝없이 차에 갇힌 나는 혀를 차며 부아를 내었다. 이놈의 도로! 이놈의 차들!
단지 피곤한 하루였다. 얼른 집에 들어가 몸을 누이고 싶은데 이 도시에 차는 너무 많고, 사람은 더욱 많아서 갈 길은 더디었다. 나도 알고는 있다. 이건 대상이 없는 화(火)다. 도로가 하루이틀 막혔던 것이 아니다. 저 차들이야 다들 그저 제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이라고 다른 날이 아니다. 그렇게 혼자 씩씩거리다 제풀에 지칠 무렵 붉은 후미등을 밝히며 서 있는 앞 자동차의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모난 곳 없이 둥그런 지붕이다. 차마다 지고 있는 지붕이 조약돌처럼 보였다. 하늘을 둥실 받치고 있는 동그랗고 작은 것들이 맨들맨들 빛을 반사하며 천천히 굴러가고 있다. 저 조약돌(같은 것)들을 딛고 커다란 강물 같은 세상이 느리게 느리게 흐른다. 운전대를 잡은 손아귀에 힘이 조금 빠진다.
“우리는 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 1
배성미의 개인전 《A tiny Dot》에 붙여진 작가 노트를 보며 나는 오래전 그 퇴근길의 기억을 떠올렸다. 화려한 불빛과 사람과 길과 차와 아파트가 스쳐 가고, 그 사이로 익숙한 고단함과 슬픔, 그리고 한편 상투적인 무심함이 스며든다. 내겐 조약돌 같았던 삶의 덩어리는 어느덧 배성미의 세계에서 작디작은 모래알이 되어 구르다가 또 어느 순간 커다란 바위가 되어 있었다. 감자 같은 바위다. ‘감자 같은 바위’와 ‘바위 같은 감자’가 자꾸 같아 보인다고 노래를 부르던 작가는 기어코 전시장 입구에 커다란 입체작품 〈감자같은바위 바위같은감자〉(2025)를 세웠다. 칠흑 같은 검은색, 밤의 빛을 머금은 덩어리다. 밤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공통으로 주어지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더하고 덜할 것도 없이 공평하게 어둠은 내린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욕망이다. 더 아늑한 주거 환경의, 빠른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의, 자본주의적 향락을 위한 간판의 불빛, 불빛, 불빛들. 어둠 이외의 무언가를 더 원하고 더하는 것은 인간의 짓이다. 그러나 아무리 빛으로 환영을 덧씌워도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몸을 가리지 못한다. 세상에서 저마다 꿰차고 있는 부피만큼, 꼭 그만한 모양의 실루엣으로 세상의 것들은 존재를 드러낸다. 결국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눈앞에 있는 덩어리로서의 물질이다. 여기-있다, 그것만큼 확실한 존재의 증명이 없다. 어둠 속에서 감자는 감자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대로 그렇게들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스스로를 내보인다.
감자와 바위. 혹여 저 멀리 산 중턱에서 덤덤히 도시를 내려다보는 바위와 금세 썩어 문드러질 감자가 비슷하긴 어디가 비슷하냐 한다면, 이 둘은 무엇보다 꼴이 닮았다. 모난 곳 없이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적당히 움푹 패고 튀어나온 모양새가,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마침내 흔적 없이 사그라질 운명의 처지가, 이 둘이 유기물이냐 무기물이냐 화학적 분류를 따지기도 전에 그 꼴로써 서로 똑 닮았다. 사실 감자는 바위보다야 인간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배고픔을 덜어주는 구황작물이자, 농민의 손에서 키워져 우리의 밥상에 이르는 상품이자, 때로는 토지 개발에 밀려 쓸모없는 것으로 지위가 추락하는 팔자의, 덜컹거리며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이다. 배성미의 작업에서 이런 감자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작가가 양평의 두물머리에서 농민들과 함께 실천했던 〈보리물고기가 된 땅〉(2015~2016)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발의 미명 아래 없어질 농지 위에 그 땅을 터전으로 삶을 일구었던 농부와 같이 더 이상 이곳에 심어질 리 없는 농작물(보리)을 예술 작품으로서 심고 가꾼 일이었다. 일회적인 프로젝트지만 시간과 정성과 노동을 동반하는, 이곳에서 머지않아 내몰리게 될 어느 가치에 대해 미련하리만큼 우직한 송가(頌歌)이다. 농사를 짓는 것도, 쫓겨나는 것도 종내에는 먹고사는 문제이다. 생존을 담보하기 위한 삶은 취약하고, 온통 사방에 ‘흔들리고 부딪치는 것들’2 이 널려 있다. 이를테면 같은 밭에서 나왔어도 개중에 어떤 감자는, 또 어떤 배추는, 상자에 담기고 트럭에 실려 이리저리 흔들리며 옮겨지다가 누군가의 식탁에 오른다. 상품성을 인정받지 못한 어떤 작물은 경작을 마친 밭에서 대수롭지 않게 버려져 끝끝내 나뒹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비슷한 사례를 한도 끝도 없이 댈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는 것은 단지 대단치 못한 상품으로서의 농작물, 사물일 뿐만 아니라 이를 만들어낸 노동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것이 정말 이토록 하찮은 것일까. 배성미의 작업은 이 무시되고 버려지는 것들을 거두어 작품으로 옮겨낸다. 여기, 실재한다. 당신 눈앞에 보이는 크기만큼, 손에 들었을 때 느껴지는 무게만큼, 지난한 노동의 결과물로서. 그의 전작 중 〈뜻밖의 노동〉(2018, 2021)은 이런 작가의 뜻을 무엇보다 잘 드러낸다. 대구 북성로의 공구골목에서 주워 온 부품들은 낡아 버려진 것인데, 이를 주워다 작가는 쓸모를 다하였다는 오명을 벗겨내듯 얼룩을 닦고 광을 내어 대단히 귀중품처럼 장에 넣어 진열하였다. 이때 그의 작업에서 작품 소재나 상황보다도 더 리얼리즘적인 요소는 바로 작품으로 만드는 수행이었다. 설령 예술의 아우라(aura)를 등지고 있어도, 마땅히 그의 작품은 실제 물질세계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쓸고 닦고, 반복하는 노동은 고귀하다. 그러나 노동의 성스러움은 어떻게 해도 삶의 무게를 초월하지 못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그 무게를 매 순간 감내하는 것이다. 배성미의 작업은 이러한 ‘노동하기’로써 비로소 구축된다.
작가는 종종 “작업은 정직해야 한다.”, “정직한 작업을 하고 싶다.”라고 말한다. 그 ‘정직’이라는 단어가 꽤나 인상적이어서 오래 곱씹어 보게 된다. 정직한 작업은 정직한 노동에서 나온다. 정직한 노동은 꾀부리지 않는다, 남의 것을 취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수고스러움을 피하지 않는다. 배성미에게 근면은 삶의 지표이자 예술 실천의 방식이다. 이번 전시 《A tiny Dot》에서도 예의 그 근면함은 ‘점찍기’로 나온다. 빨간색으로, 파란색으로, 세상의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며 점을 찍는다. 담고 담아도 다 담기지 않을 무수한 것들을 그린다. 그것이 나인지 너인지 우리인지 그것인지 이름 붙이지 않고 행한다. 그냥 찍었다는 점은, 겹치고 흩어지며 어딘지 바위와 산을 닮은 모양이 된다. 복작거리는 인간의 삶에 비하면 저 바위는 어찌나 의연한지. 그런데 언젠가 바위도 부스러진다, 모래가 된다, 사라진다. 바위조차 마냥 세상사의 관조자일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점이다. 홀로, 서로 기대어, 또 각자 저 멀리 떨어져 있을지언정 점, 점. 모두가 닮은 꼴이다. 이렇게 그의 작업에서 개개인의 미시 서사가 어느덧 우주적 입장의 거시 서사와 포개어진다. 그 인식의 전개 과정에 행여라도 생략이 있을까, 작가는 전시장 바닥에 배추 한 포기(〈사소한 작은 셋〉, 2025)를 무심히 던져 놓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점은 유일자(唯一者)도, 추상적 관념도, 허상도 아니다. 감자는, 배추는, 바위는, 점은 삼라만상 존재의 제유법이다.
그런데 존재 자체에는 위계와 단계가 없다. 크거나 작거나, 희귀하거나 흔하거나 하는 비교와 상관없이 존재에는 오직 (계속 또는 새로이) 존재하거나 (애초 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의 두 가지 결론만 있을 뿐이다. ‘거의’ 존재한다거나 ‘반쯤’ 존재한다, ‘더’ 존재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진법의 0과 1처럼 살거나 죽거나, 있거나 없거나 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의 것들은 전부 존재로서 평등하다. 콩 한 알, 멸치 한 조각, 하다못해 병뚜껑 하나도 다 세상에 있다는 점에서 같다. 이번 전시에는 〈사소한 작은 하나〉(2025)와 〈사소한 작은 둘〉(2025)이라는 한 쌍의 작품이 있다. 각기 흑백의 바탕으로 마주 보는 두 작품에는 균일한 간격으로 온갖 사물이 붙어있다. 어떤 물건의 일부이기도 하고, 그럴듯한 미니어처이기도 한 것들을 보며 그 형태가 무엇인지 발견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여기 사람이 있네, 공룡도 있구나, 하며 공들여 찾아내는 건데 그 사물을 세심히 관찰하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들이 다 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체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그저 까만 점이다. 환한 바탕에서는 그나마 조금 더 형태를 구분할 수 있게, 그 바탕마저 어두우면 배경까지도 한데 뭉뚱그려 보이는 커다란 점이다. 이와 같이 어느 생명이나 사물이나 존재론의 측면에서는 무엇이 더 나을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그저 점이라는 사유가 이번 전시에서 윤리적 대전제로 줄곧 반복된다.
따라서 배성미의 작품 제목에 붙여진 ‘사소한 작은 하나, 둘, 셋’에서 숫자는 우선순위나 순서가 아니다. 하나하나 개별 존재를 호명하는 것이고, 동시에 1, 2, 3, …, ∞(무한대)로 이어질 수많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다. 어느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하지 않으니 모두 다 사소하다. 그 속에 내가 있다. 세상의 것들에게 눈길을 맞추던 작가는 이윽고 스스로에게 그 시선을 멈춘다.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본다. 문고판 책 한 권, 돋보기 하나, 작은 돌멩이 하나이다. 돋보기를 써야 할 정도로 나이 든 몸으로 자신의 한 손으로 감당할 수 있을 법한 돌=물질을 취한다. 그 와중에도 책=예술을 버릴 수 없어 기어코 세 요소가 한데 뭉쳐졌다. 하지만 이들의 결속이란 가는 실로 허술하게 대충 몇 번 둘러놓은 게 다다. 금방이라도 풀어져 버릴 것 같은 이것들과 끝까지 함께 가려면 잘 움켜쥐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배성미는 〈자연스러운 무게〉(2025)라고 부른다. 삶이 별거냐, 각자 감당하고 감내할 만큼의 몫을 쥐고 가는 것이다. 점은 점으로서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부처처럼 해탈한 모습인데, 그런 그일지라도 어깨에는 여전히 돌덩이 같은 인생의 짐3 이 메어져 있을 것 같다.
‘감자 같은 바위’이거나 ‘바위 같은 감자’이거나 결국 우주 전체의 한 부분이다. 무엇으로 보느냐는 시선과 관점과 마음의 거리에 달렸다. 산다는 것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초점을 맞추듯 나로부터 세상의 거리를,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나에게 이르는 거리를 조절하는 일이다. 내가, 당신이, 그것이 점으로 보이게끔, 아니 점으로 보이지 않게끔. 자칫 선문답처럼 느껴질 수 있는 주제이거늘 배성미는 전시 내내 끊임없이 물질성을 환기하며 구체적인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한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단단히 두 발로 딛고 선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삐죽 튀어나온 굴곡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삶의 힘겨움과 애달픔은 작품 속에서 덤덤하게 수렴된다. 그다지 완벽하지도 않고 울퉁불퉁한 채 그대로 종국에는 다 하나의 점이 되었다. 작가의 손으로 세상이 이렇게 둥글려진다.
점 같은 사람이 점 같은 사물로 점 같은 작품을 만든다. 그것은 사소하지만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사건이다. 작은 점 하나. 작은 점 하나’들’. 모래알이거나 조약돌이거나 바위이거나 그 점 덩어리가 어떻게 생기었든 아무렴 어떠랴, 모두 다 이토록 가엾고 아름답다. 감자 하나를 손에 쥐어 보자. 이리저리 못생긴 주제에 손에 착 들어온다. 제멋대로 생겨도 될 것 같다, 제멋대로 살아도 될 것 같다. 세상과 나도 그렇게 맞춰지면 좋겠다 싶다. 점 하나니까, 사소하면 사소한 대로. 배성미의 《A tiny Dot》은 이렇게 우리의 삶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돌이켜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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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성미 작가노트, 2025
2 〈흔들리고 부딪치는 것들〉은 배성미의 작품명 중 하나로, 이 작업은 비디오, 조각, 설치 작품 등의 형태로 여러 차례 변주된다. 이 제목이 처음 등장한 초창기 비디오 작품(2007)에서는 개인의 감정과 관련된 단어인 ‘욕망, 자기애, 이기심, 용기’가 화면 속에 일렁였다. 그러나 2018년 재제작된 비디오에서는 키워드가 ‘욕망, 물질, 관계, 말, 시선’으로 변경되어 타인과의 관계와 사회의 작동 원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깊어진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에는 같은 제목으로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흔들리며 전달되는 배추, 대걸레 등의 사물을 캐스팅하여 구상 조각으로 구현하기도 하였다.
3 배성미는 본인의 배낭을 시멘트 캐스팅한 〈용기를 위한 기념비〉(2007)를 만든 바 있다.
김소라, 큐레이터 _ ‘A tiny Dot’
부조리에 낯섦에 대한 사유
살아가면서 인간은 자각에 이르는 만큼,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인식하는 만큼 자유로울 수 있다고 했던가. 이러한 가능성과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 배성미는 깊숙이 양분된 세상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눈앞의 실체와 의식 체계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우리가 감히 진짜라고 단언하는 것들을 의문시하고 섣부른 판단을 구성하는 상투적인 유혹에서 과감히 멀어지는 길을 택한다. 구태의연한 이해를 거부하는 것은 일상 속에서 수도 없이 마주하던 모호함에 눈뜨는 의지의 자각이며, 습관이나 권태 속에 속절없이 매몰되지 않으려는 자기반성의 노력일 것이다. 틈입하는 부조리의 경험이 ‘왜’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때 모든 것은 시작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미한 속도감으로 흘러가는 <뜬구름>(2021)의 모습이다. 창밖의 구름은 자연의 섭리에 합당한 방향으로 한가로이 흘러가고 있으며,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의지나 윤리, 도덕을 배제한 채 그저 주어지는 풍경에 순응한다. 언제나 그래왔다는 듯이 무심한 모습으로, 때로는 감탄해 마지않으며 눈앞의 아름다운 광경을 그저 평온하게 목도할 뿐이다. 시차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 앞에서 그 누구도 선뜻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묻지는 않을 테다. 이내 걸음을 옮겨 전시장에 들어서면 관람객은 다시 모호하고도 오묘한 장면과 마주한다. 유리 뒤편에 놓인 무언가의 형상은 또렷하게 읽히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덩어리의 움직임은 막연함과 불가해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보는 이에게 두려움과 희미한 좌절마저 경험하게 한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리 안의 실체들은 안개처럼 흐려져 추상적인 형상으로 변환된다. <흐린시선>(2021)이라는 제목처럼 다분히 의도적인 틀이 없다 하더라도 관람객은 이내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의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할 터이다.
이윽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면 기계적으로 반복되어 움직이는 거울의 방향으로 도달한다. 거울이 아래위로 움직일 때마다 우리의 시선은 마치 결박이라도 당한 듯이 정확히 거울 속의 장면을 응시한다. 똑같은 리듬으로 되풀이되는 일방향적인 움직임은 반복적으로 시각적 레이어를 덧씌우며 두꺼운 잔상을 남긴다. 하나의 잔상은 연이어 복수의 잔상으로 이어지고 실체를 잃어버린 형상으로 굳어진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관람객은 거울과 시선 사이의 단절을 가늠해 볼 틈도 없이 작가의 의도에 처하게 된다. <흔들리는 거울>(2021)을 통해 전달된 시각적 양상은 아무런 의심 없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던 스크린 위의 부유하는 이미지와 숱한 정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문제의식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보다 분명한 실체를 눈앞으로 가져올 수 없으며 형상의 껍데기만 남을 뿐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일종의 실험과도 같다. 우리가 믿는 진실은 거울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거울 속에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권서현, 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 _ ‘흔들리는 거울’ 전시서문 中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름답다
내 생각에, 작가는 그가 품은 작업 틀이 진중한 탓에 일반 관객들까지 설득할 여유가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관한 그 어떤 해석조차도 일종의 경외감을 애써 뿌리치기는 힘들다. 뭔가 하면, 위대한 미술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 앞에 엄습하는 확연한 침묵이 있지 않나. <뜻밖의 노동_무게를 팔다>는 관객들에게 침묵을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선보인 장소를 그렇게 바꾸어 놓았다. 만약 이런 효과까지 작가가 꾀했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우리는 다수의 지식이 시간의 축적 속에 보존되어 있는 도서관을 찾는다. 어떤 점에서 이 전시의 공간 구성은 라이브러리 형태와 굉장히 흡사하다. 작가가 모든 오브제를 세척해서 모아둔 철가루와 기름때가 공간의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이 더미를 도서관의 어떤 시설에 대입해서 은유하고 싶은데 나로서는 생각이 못 미친다. 작가는 여기에 흡족한 대답을 해줄 것 같다. 도서관은 읽히는 책보다 안 읽히는 책들이 더 많이 쌓이는, 어떤 면에서는 책들의 무덤이다. 여기, 기계의 잔해들이 있는 곳도 마찬가지다. 이 조각난 기계부품들의 추모식에는 단지 그것만으로는 완벽할 수 없겠지만, 그 낱개들마다 지나간 어느 과거에 마주 했을 영광을 떠올리는 힘이 서려있다.
윤규홍, 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예술사회학 _ 전시리뷰 中
움직이는 기억의 땅
‘나’라는 주체가 곧 ‘1평(3.3m²)의 공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이 텍스트의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이 텍스트는 인간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대상화된 1평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개념을 돌이라는 자연물과 상치시킴으로써 결국 인간이 땅을 소유하는 개념으로 등장시킨 1평의 공간이라는 것은 원래 자연의 소유였음을 피력한다. 더불어 나(우리)라는 주체 역시 이 돌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도래했던 존재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관객에게 반문한다. 결국 작가의 비판적 메시지는 땅 1평을 소유와 환금성의 척도로 재단하는 오늘날 현실에서 모든 생산물의 근원지라는 땅의 본질적 의미는 망각으로 인해 오염되거나 훼손되고 있다는 진술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녀의 작업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이러한 망각이 원래 타자의 것인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음모자의 은폐로부터 타자화된 것인지에 관해서 말이다. 그래서 망각으로부터 길어 올려야 할 이 시대에 요청되는 우리의 공동의 기억이 정녕 무엇인지를 ‘땅 한 평’으로부터 같이 생각해 보자고 말이다.
김성호, 미술평론가 _ 전시서문 中
반쯤 열린 문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세계를 대상화시켜 자신의 외부에 두고 관찰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세계가 자기 안에 있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배성미는 세계와 자기 내면 사이에 문을 하나 만들어 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밖과 안을 구분한다. 그러나 주로 문을 열어두어 세계와 내면을 연결하고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배성미는 현명하게 문을 열고 닫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었고, 부조리하다고 여기는 사회문제에 대해 작업할 때 대안 없는 비판을 하거나 현실과 괴리된 이상향을 제시하지 않았다. 배성미의 작업들은 지금 여기의 사람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에 일침을 가하며, 본질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지금 여기 너머를 사유하게 한다.
《바람에게 바람》은 도시에서 살아온 작가가 제주도의 농촌마을에 잠시 거주하면서 느낀 생각과 감정을 풀어낸 전시다. 새로운 환경은 작품의 소재와 재료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번 작품들의 주요 소재와 재료는 제주도의 자연을 대표하는 바다, 현무암, 바람이다. 언어의 사용도 두드러진다. 이전의 작업들에서는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을 설명을 하거나 직접 질문을 던졌다면 이번에는 감정을 담아낸다. 따라서 작품 속 단어들은 문장을 이루지 않고 나열된다. 문장이 되지 않은 단어는 의미가 확정되지 않기 때문에 단어의 의미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언어유희 또한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힌다. 전시제목이자 작품제목인 ‘바람에게 바람’은 고유명사인 ‘바람’과 동사의 명사형인 ‘바람’의 재치 있는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같은 음의 반복은 둘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든다. 또한 목적어가 없기 때문에 바라는 대상이 감상자 모두에게 열려있다.
개발의 열풍이 불고 있는 제주도에서 작가는 땅을 둘러싼 부조리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땅은 투기의 대상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요즘 땅에서는 나무나 곡식 대신 돈이 자란다. 사람들은 돈이 잘 크도록 임야나 농경지를 공업용지나 주택용지로 변경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어서 누울 한 평의 땅도 없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걸어서는 하루 안에는 다 돌아보지 못할 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움직이는 땅_나는 3.3㎡입니다>는 3.3㎡ 즉 한 평이라 불리는 크기의 바퀴가 달린 땅이다. 작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는 대신 한 평의 땅을 시각화함으로써 ‘땅은 무엇이며 지금 땅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김연주, 문화공간 양 기획자 _ ‘바람에게 바람’ 전시서문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미지의 여행
배성미의 작품에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기호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관객에게는 물론, 작가 자신에게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회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대상들이다. 그것은 이미 결정화된 한 시간과 공간을 늘어놓는 행위가 아니라, 해석해야 하는 미지의 대상으로 열려있다.
반복 속에서 차이를, 차이 속에서 반복을 간취하는 것은 공명의 효과이다.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장소와 순간의 공명이 간격 사이를 보이지 않은 끈으로 연결하면서 공감을 만들어낸다. 단번에 이해되기 보다는 끝없는 해석과 대화를 요구하는 배성미의 작품들이 사진, 영상, 오려진 종이, 레이저 조각 등 반듯반듯한 직선의 경계 면들로 구획되어 있는 것은 다소 역설적으로 보인다. 그녀의 작품은 방법론이 이성적으로 정립된 철학이나 과학, 또는 경제의 직선과는 거리가 먼,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통로들을 제시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로나 우회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소통은 이미 결정된 것이나 객관적인 것을 단순히 재확인하는 방법이나 재현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는 예술 고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선영, 미술평론가 _ 전시서문 中